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일레 셀라시에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내일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36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 [[에티오피아군]]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약약강]]으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약소국 상대로 독가스까지 뿌린 이탈리아군]]에 의해 에티오피아는 패전하여 하일레 셀라시에는 결국 [[대영제국]]의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를 5년간 겸임하였으나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소련]],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 [[멕시코]] 등 국제 사회 다수는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은 물론 에티오피아 합병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불어 에티오피아 고원 지역의 일부는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41년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에티오피아 진공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해 [[이탈리아 왕국군]]과 싸웠고 1941년 영국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 저항세력과 함께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탈리아군을 축출하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환도(還都)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를 되찾은 그 해 12월 영국과 협정을 맺고 정식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1940년 동아프리카에서 전투가 발발했을 무렵부터 연합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국 간의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전승국 측으로 참가하여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이 불법이며 무효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승전국으로서 이탈리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았다. 하일레는 권력을 회복하면서 다시금 사회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때부터 에티오피아 황제라는 개인적 권위에 의존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새 헌법으로 더 많은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여 본격적인 전제군주로 군림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내부의 반대가 심하였다. 1960년 12월 12일에는 황제가 [[브라질]]을 순방하는 동안 황실 경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디스아바바를 잠시 장악하였으나 [[왕당파]]의 반격으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의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63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5번째 총재를 역임하였다. > "나를 경배하지 말라,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사람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한다." 이런 업적 때문에 엉뚱하게도 [[자메이카]] 흑인들 사이에서 하일레 셀라시에를 [[구세주]]로 숭배하는 [[래스터패리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일레 셀라시에 본인은 에티오피아의 [[국교]]인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교도로서 정통 정교회 기독교인이었으니 아이러니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서양 쪽 기독교와는 달리 [[합성론]] 계통의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한다. 물론 서양 쪽 기독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오리엔트 정교회 역시 초대 교회에서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정통 기독교이다. 사실 그걸 떠나서 서방 교회 입장에서 보든 오리엔트 정교회 입장에서 보든 래스터패리교가 [[이교도]] 내지는 [[이단]]인 것은 마찬가지다.] 셀라시에가 보기엔 래스터패리교라는 괴상하고 불경한 [[신흥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구세주로 떠받든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